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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현충인물

3월의 현충인물

이신애 애국지사


이신애 애국지사
사이버참배
-이신애 애국지사-

국립대전현충원 3월의 현충인물 이신애 애국지사는 1891년 평안북도 구성에서 태어나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를 따라 원산으로 이주했다. 보통학교를 졸업한 선생은 개성 호수돈여학교로 진학했으나 어려운 가정 형편과 결핵으로 건강이 악화되자 학업을 중단해야 했다.

이후 건강을 회복한 이신애 선생은 1914년 성경여학교에서 공부한 후 1918년 루씨여학교 두산리분교에서 교편을 잡고 여성들에게 독립 사상을 고취하는 일에 열중했다. 그 무렵 손정도 목사의 설교에 깊은 감명을 받은 선생은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1919년 혈성부인회에 가담해 상해임시정부 군자금 모금과 강우규 선생의 부탁으로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 암살을 위한 군자금 모집에 주력하는 한편 서울로 들어온 강우규 선생을 은닉시키는 것은 물론 의거에 필요한 물품을 제공하는데 힘썼다.

이신애 선생은 강우규 선생이 서울로 오기 전인 1919년 9월 초, 조선민족대동단 부인단총대에 선출되어 여성동지를 규합하고, 동지들을 모으는 활동을 했다. 독립을 위해 투쟁을 벌이고 있는 이신애 선생을 본 이종춘 선생은 “저토록 젊은 여자도 조국을 위해 투쟁한다면 우리도 독립할 수 있으리라”라는 확신으로 조직에 참여했다.

1919년 10월 초 조선민족대동단은 조직의 본부를 상해로 이전할 계획 아래 의친왕 이강 공(李堈 公)의 상해 망명과 대대적인 독립 만세운동을 추진했다. 이때 이신애 선생은 여성 대표 자격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거사를 준비했다. 그러나 11월 11일 의친왕 일행이 일경에 체포되며 대동단의 조직은 대부분 붕괴되어 만세운동을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다시 만세운동을 준비한 이신애 선생 등은 11월 28일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안국동 경찰관 주재소 광장에서 선언서를 뿌리고 태극기와 「대한 독립 만세」라고 쓴 깃발을 흔들며 ‘조선 독립 만세’를 높이 불렀다. 이에 일경은 만세운동 확산을 우려해 이신애 선생을 포함해 독립운동가들을 신속히 체포했다.

체포된 이신애 선생은 종로경찰서에서 조사를 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다. 투옥 중에 3·1운동 1주년이 되자 유관순 열사와 옥중 만세 운동을 전개하다 일상생활이 어려울 정도로 심한 고문으로 고초를 겪었다. 광복 후에는 ‘한국부인회’를 조직, 부녀 계몽운동에 투신하셨다.


정부에서는 평생을 조국에 헌신한 이신애 애국지사에게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고,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하여 그 공훈을 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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