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험 소감문
제 목(제9회)그들은 충분히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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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2014-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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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충분히 아름다웠다.’
천안서여자중학교 양혜인
5월 9일 우리는 국립대전현충원을 가게 되었다.
버스를 타고 한 시간쯤 달리다보니 어느새 현충원에 도착했다. 그리고 현충원에 버스로 살짝 진입해 옆 창문을 보니 수많은 묘비와 꽃들이 내 눈앞에 있었다. 그리고 그보다 좀 더 지나면 커다란 동상들이 나를 위압하는 느낌이 들었다. 버스에서 내려서 현충원 문 앞에 나란히 섰다. 앞에 검은 복장을 한 아저씨가 보인다. 분위기가 제법 엄숙해 떠들고 있던 내가 괜히 죄송하였다. 곧이어 간정한 옷차림을 한 남자 분들이 악기를 들고 걸어 나왔다. 그들은 우리가 잠잠해지자 연주를 시작하였다. 이런 식으로 연주를 듣는 것은 처음이었는데 매우 장엄하였다. 그리고 기수대가 나와서 깃발을 들고 한 치의 오차도 없어 보이는 모습으로 연주에 맞추어 춤을 추었다. 그들의 표정은 매우 비장하여 나 또한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 다음 칼을 꽂는 장면으로 무대가 끝났다. 우리는 앞에 있는 계단을 천천히 올라가 걸었고, 참배드릴 장소에서 발을 멈추었다. 회장 언니와 담임선생님이 대표로 앞에 나가 향을 향로에 넣고 같이 참배를 하여 순국선열과 호국영령들께 감사의 뜻을 기렸다. 그 때는 잔잔한 음악이 은근히 다가와 마음을 달구었다. 참배가 끝나고 왔던 길로 다시 돌아가기 위해 줄을 바꾸어 서서 현충문으로 걸어 나갔다. 가는 길에 옆에 있던 나무와 잔디들이 가는 길을 좀 더 싱그럽고 밝게 바꿔놓은 듯 했다. 물론 내가 키가 커서 머리에 찔리긴 했어도 가는 길 만큼은 마음이 편안했다.
드디어 현충관에 도착했다. 현충관도 오는 길 만큼 밝고 싱그러운 느낌일 줄 알았는데 내 예상과 전혀 달리 무뚝뚝한 사람들 보는 듯 그냥 차가운 느낌이 들었다. 추억도 남길 겸 사진도 한 컷 찍고 현충관 안으로 들어섰다. 그런데 작은 영화관 같은 곳이 펼쳐졌다. 거대한 스크린에 여러 개의 붉은 의자들이 있었고 전등은 반쯤 꺼져 있었다. 나는 선생님이 안내하시는 자리에 가서 앉았다. 그 때 불이 꺼지고 선생님이 해준 이야기로는 ‘그 날’이라는 제목인 영화인데 2002년 6월 연평해전과 관련된 이야기라고 해 주셨다. 영화가 시작되었고 내용은 어떠한 여 기자와 남자 사진 기자가 연평해전에 대하여 기사를 쓰기 위해 취재를 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여기자는 어차피 식상할 내용일 것이라면서 비판 하였지만 어느 한 주장에 밀려 억지로 기사를 쓰게 된다. 그래서 찾아간 곳이 연평해전 유가족 중 어느 한 분을 만나 기사를 쓰게 된다. 그리고 이야기가 펼쳐지는데... 이야기는 이러하다. 그녀에겐 남편이 있었다. 그는 해군이었고 연평해전에 참가한 군인 중 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다른 부부들도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특히 한 가족은 갓 백일 된 아기가 있었는데 남편이 파티를 마치고 동료들을 보낸 뒤에 아기한테 뽀뽀하는 것을 아내는 아기가 깰까봐 말렸었다. 하지만 지금 그것을 매우 후회한다고 했고, 어떤 해군의 아들을 둔 부모도 엄청 슬퍼했다. 이유는 그녀들의 남편과 자식들 모두 해군이다. 주로 연평도 부근에서 근무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곳에서 훈련을 하고 가끔 대화를 하면서 꽤나 행복해 보였다. 그들도 2002년 한국의 월드컵 4강 진출을 기뻐하며 즐거워했다. 하지만 그 즐거움도 잠시 북한의 배가 우리 해군의 배 근처를 계속 돌기 시작했고 우리 해군들도 어느 정도 예감을 했지만 먼저 공격하지 않는다는 철칙에 따라 계속 주시만하고 있다가 북한의 선제공격을 받고 가만히 있던 우리 군들도 드디어 총을 발사한다. 이것이 바로 연평해전의 시작이 되었다. 나는 이때까지도 그냥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뒷일을 보고 나니 생각이 확실히 바뀌었다. 우리 해군은 총을 발사하기에는 너무 늦었는지 부상자와 사망자가 잇따른다. 한 명은 죽기 직전에 어머니에게 전화를 하려다 통화권이 이탈되어 결국 마지막 목소리도 못 듣고 죽었다. 이 부분을 쓰면서 감정이 너무 몰입되었는지 안쓰럽다 못해 내가 대신 전화를 해주고 싶었다. 배의 손잡이를 잡고 있던 해군은 총에 맞았지만 손잡이를 놓지 않았다. 사실 그가 손잡이를 놓았다면 우리 배는 북한으로 내려가 북한의 배가 되었을지 모른다. 그리고 그를 가장 존경하던 의무병도 동료를 잃은 분노와 두려움에 대신 총을 잡다가 전사하였다. 하지만 그 당시 우리나라는 2002년 6월이었고 한참 월드컵에 흥분되어 있었다. 정작 한편으로는 월드컵 4강전보다 더욱 더 중요했던 연평해전은 잠깐 뉴스에서 물 흐르듯이 스쳐지나갔고 나 또한 겨우겨우 이 영화를 통해서 연평해전에 대하여 알게 되었다. 차라리 이 이야기가 이슈가 되어 우리 영웅들의 이야기를 좀 더 알릴 수 있었다면 좀 덜 억울하고 모두가 뜻을 기릴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유가족은 얼마나 분통터지고 총에 맞아 고통스럽게 죽었을 자신들의 가족을 안쓰럽게 생각했을까? 너무 슬펐다. 그리고 이 이야기를 쓰던 여기자와 남자 사진기자는 이런 기사를 쓴 것에 대해 후회가 아닌 오히려 자부심과 깨달음을 얻고 웃음으로 영화를 마무리 지었다. 사실 영화가 너무 현실적으로 제작되어서 울 뻔 했지만 사람이 많아서 꾹 참았다. 나 혼자 있었다면 흐느끼면서 울어버릴 것 같았다.
불이 켜지고 몇몇 눈시울이 붉은 사람들이 보였고 그대로 나와 보훈미래관에 들어섰다. 그곳에서 군장비들을 주로 보았고 사실 2층까지 못 가봐서 많은 것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기억에 남은 것이 있다면 장갑차이다. 이름이 귀엽기도 했고 디자인이 깔끔해서 눈에 띄었다. 용도는 잘 보지 않아 모르겠지만 왠지 모를 진지함에 휩싸여 친구와 함께 야외 전시장을 한참 돌았다.
그리고 우리는 차 안에 있던 수건을 들고 묘비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수많은 묘비가 엄청 많았는데 한편으로 생각해보니 우리나라를 위해서 아니, 모든 사람들을 위해 힘쓴 분들의 엄청나게 많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외국문물에만 너무 관심 두고 있는 내가 평소에 애국자라고 자부했는데 내가 생각해도 너무 어이없고 부끄러웠다. 그래서 그 부끄러움을 씻어내기 위해 수건을 고이 접어서 내 동생 머리 빗어주듯이 살살 닦아드렸다. 옆에는 조화가 꽂혀 있었는데 왠지 더 의미가 있어 보였고 몇몇 해군의 묘비 위에는 동그란 무언가가 붙어 있었는데 그게 무엇인지 궁금했지만 일단 닦고 보았다. 꽤 열심히 닦은 것 같아서 괜시리 뿌듯했다.
모든 일정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은 뭔가 홀가분했고 특히 정말 감동 받았던 연평도 해전도 다시 한 번 생각해보았다. 국가유공자와 독립투사 분들께 정말 감사했고 나도 우리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좀 더 길러야겠다.